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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비상/칼럼

다큐는 지루하다고? <코브>를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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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서 웃음과 탄식이 번갈아 터져나왔다. 유쾌하면서도 끔찍히 슬펐다. 상영관을 나와서도 얼굴이 한동안 뜨거워 얼얼했다.

영화 <코브>는 폭로 다큐다. 냄새 나고 더러운 세상의 이면을 날것으로 보여주기. 우리의 편한 일상이 사실 잔인한 착취로 유지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응시하기. 그런데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유쾌할까. 1급 보안시설 못지 않게 은폐된 현장을 필사적으로 포착하려는 이들이 스스로를 오션스 일레븐에 비유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온몸을 던지기 때문일까. 물리력을 행사하며 배타적 태도로 일관하는 타이지 어부들에 맞서면서도 돌아서면서 "감사합니다" 건네는 여유 때문일지도. 아니면 그들이 이루어낸 몇몇 승리에서 오는 통쾌함이거나.

2003년 일본의 어부들이 타이지 시의 작은 만에서 돌고래를 잡아올리고 있다. 사진=Brooke McDonald, Sea Shepherd Conservation Society via AP


그곳은 철저히 숨겨진다. 세계 각국의 아쿠아리움으로 팔려갈 돌고래를 배로 잡아들이는 장면은 그나마 관찰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기 거래를 위한 돌고래 대량 살육 현장만큼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소문으로 짐작되더라도 결코 렌즈에 담겨 생생한 실체로 드러나선 안 됐다. 공공연한 비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범죄 현장. 그곳이 바로 코브(cove)다. 옴폭 들어간 좁은 만. 이곳을 놓고 숨기려는 자와 들추려는 자가 맞선다.

그런데 완전봉쇄는 애초 불가능했다. 결국 바다는 흐른다. 오션스 일레븐에 합류한 다이버 가까이 돌고래 한 마리가 다가온다. 도살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것일까. 하지만 어부가 휘두른 칼을 피하진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돌고래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나온다. 우리가 아쿠아리움에서 보는 돌고래는 선택된 것들이었다. 조련사에게 선택되지 못한 돌고래는 작살을 맞게 된다. 일본 관료의 설명과 다르게 돌고래는 '고통 없이' 즉사되지 않는다. 어부는 작살을 꽂았다 뽑고 다시 꽂기를 반복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숨을 멎은 돌고래를 다시 작살을 이용해 끌어올린다. 잔잔한 만은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온통 핏빛이다.

한 노인이 호화스러운 컨퍼런스장 안으로 서서히 걸음을 옮긴다. 상체에 걸어놓은 평면 모니터에서 화면이 흐른다. 릭 오배리의 용기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일본 경찰의 취조와 미행에 시달리는 그의 '피해망상증'이 부럽진 않다. 그의 용기는 마치 자신이 진 과거의 빚을 덜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한때 유명한 돌고래 조련사였던 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반성 말이다. '왜 포르셰를 사는 대신 한 마리의 돌고래라도 사들여 바다로 돌려보내지 못했을까'

그는 진심으로 후회하는 것 같았다. 후회가 보통 과거에 얽매이는 생산적이지 못한 감정이라고 이해되는 것과 달리 그의 후회는 당당한 오늘을 살게 하는 원천처럼 느껴졌다. 그는 무기력한 논의가 한창인 국제포경위원회(IWC) 회의장으로 돌고래 학살의 실체를 보여주는 모니터를 목에 걸고서 회의장에 들어섰다. 영상을 빤히 보면서도 회의장이 왜 그리도 잠잠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폭발이 일어났어야 했다. 놀라움과 분노로 말이다. 그런데 조용했다. 그는 곧 끌려나갔고 아마 지루한 협상이 재개됐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지루하다고? <코브>는 다큐의 진화를 보여줬다. 다큐가 눅눅한 나래이션으로 채워지고, 무거운 부채감과 묘한 무기력감을 갖고 자리를 뜨게 만들거나, 막연한 문제 제기에 그쳐 고민거리만 하나 더 어깨에 얹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최근에 작품을 보러 극장을 찾았는지 생각해보라. <코브>는 상업영화까지 통틀어 최근 본 영화 중에서 최고였다. 픽션에 기대지 않고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마음껏 웃고 울 수 있겠다.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이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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