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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은 답이 아니다

<영원한 봉인> 또는 100,000년간의 망각

"여러분은 여기 들어와선 안 된다. 이곳은 매우 위험하다. 지금 이 목소리를 들었다면, 뒤돌아 걸어가고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

여기 무려 10만 년 동안이나 유지돼야 할 인공시설이 있다. 이 시설은 매우 위험한 물질을 다량으로 보관하게 된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가 그것. 우라늄 핵분열로 발생되는 온갖 방사성물질은 위험한 방사선을 방출할 뿐더러 자연에서 쉽게 분해돼 사라지지도 않아서 이를테면 플루토늄의 경우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만 2만4천 년이 걸린다.

현재까지 인류는 이런 고준위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어떤 해답도 또 실제 경험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핵폐기물 처리장이 얼마나 오래 유지돼야 할지는 오직 이론적인 추정에 의존해 있다. 핵폐기물의 유독성이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유럽에서는 최소 10만 년으로 간주한다. 미국의 경우 이를 100만 년으로 계산한다.

핀란드에서 처음 지어지고 있는 최초의 핵폐기물 처리장. 땅을 깊게 파서 만들어지고 있는 거대한 지하세계. 이곳의 이름은 은폐장소라는 뜻의 핀란드어, 온칼로(Onkalo).

세계 최초의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장 온칼로(Onkalo) 건설현장의 입구. 온칼로는 건설되고 100년 뒤엔 봉쇄돼 입구는 거대한 콘크리트로 덮힐 예정이다.

10만 년, 말은 쉽다. 그런데 이 숫자가 어떤 의미지인지 도대체 감이 오는가? 인류의 출현이 대략 10만 년 전, 오늘날 알려진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가 대략 3만 년 전, 피라미드가 대략 4500년 전, 예수의 탄생이 2010년 전, 방사선의 발견이 대략 115년 전.

온칼로가 지상이 아니라 땅 깊은 곳에 핵폐기물을 저장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상의 세계는 너무나 불안하다는 것. 전쟁과 불황 따위 말이다. 그래서 일본과 같이 지진이나 화산 다발지역만 아니라면 차라리 지하가 훨씬 더 안전하다.

다만 중요한 전제가 있다. 10만 년 동안 온칼로를 안전하게 관리해줄 사회나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온칼로는 외부의 관리나 안전대책 없이도 그 자체로 온전해야 한다. 심지어 6만 년 뒤에 빙하기로 접어들어 지구의 상당 부분이 툰드라로 변하면 인류의 존속마저 장담할 수 없다.

차라리 불안한 지구에 두지 말고 우주로 이 위험한 쓰레기를 쏘아 올려서 버리자구? 핵폐기물 처리장을 놓고 고심하던 사람들 역시 이런 질문들을 자문해보고 거꾸로 이렇게 되묻는다. "만약 로켓이 발사대에서 폭발한다면?"

핵폐기물을 땅 속에 아주 오랫동안 묻어둬야 한다면, 이 시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먼 후세대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언어라는 가변적인 소통수단은 불과 수천 년이 지나면 해독할 수 없이 변해버릴 것이다. 위협을 나타내는 비언어적인 형상물에 대한 구상도 이미 나왔다. 뾰족한 가시로 가득한 곳을 맞딱드린다면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기가 꺼려질지도 모른다.

폐기물 격리시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표지로 고안된 가시밭의 이미지(concept by Michael Brill and art by Safdar Abidi).

실제로 이와 관련된 연구가 이미 1990년대 미국 정부에 의해 수행됐다. 미국 에너지부에 의해서 발간된 <폐기물 격리시설로의 우발적 침투의 방지 표지에 관한 전문가 평가> 보고서엔 인류학, 언어학, 지형학 등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이 보고서 제목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핵폐기물 처리장의 가장 큰 위협은 사실 지진이나 화산 따위의 자연재해가 아니다. 바로, 인간이다. 수만 년 뒤에 그들이 핵폐기물 처리장을 발견한다면, 경고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파헤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바로 피라미드나 로제타석에 대해 우리가 이미 그랬듯 말이다.

10만년 뒤에 후세대들이 핵폐기물 처리장을 발견한다면, 경고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파헤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위험의 경고를 해골 상징의 상형문자로 표현한 예(art by Jon Lomberg)

그래서, 망각, 이는 어쩌면 온칼로를 외부와 격리시키는 가장 안전한 장치가 될 수 있다. 온칼로를 또 다른 피라미드가 되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아예 있는 줄도 모르게, 호기심조차 갖게 하지 말자는 것. 이로써 봉인은 영원해진다. 우리가 망각해야 한다는 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말장난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미샤엘 바드센 감독이 <영원한 봉인>에서 여러 사람들의 입을 빌려 다다른 가장 현실적인 '결론'이 이런 것 같다. 우린 미래세대들에게 가장 위험한 유산을 남겨주는 동시에 그들을 가장 위험한 잠재적인 침입자로 여겨야 할 처지에 놓였다. 물론, 그들이 물려받을 가장 오래된 유물이 만약 맹독성 폐기물이라면 매우 애석할테지만 말이다.

단 한 곳의 영구저장시설도 확보하지 못한 고준위 핵폐기물은 원자력발전소 내부의 임시 저장소에 보관되고 있으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도 드러났듯, 수조에 보관된 상태에서 냉각수를 순환시키지 않으면 과열로 인해 화재를 일으킬 수 있다. 사용후 핵연료에서 나오는 열을 100도 이하로 냉각시키는 데만 40~6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고준위 핵폐기물은 총 25~3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폐기물의 양은 매일 늘어나고 있다.

이지언

<영원한 봉인> 트레일러

영원한 봉인(Into Eternity) 영화 정보

2011년 서울환경영화제 상영작(핵, 원자력, 에너지 소비의 그늘 섹션)
감독: 미카엘 마센(Michael Madsen)
제작연도: 2010년
국가: 덴마크
장르: 다큐멘터리
상영시간: 75분

<시놉시스>
핀란드에서 세계 최초로 핵폐기물을 기반암으로 밀폐된 공간에 영원히 봉인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다. 10만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도록 설계된 폐기물 보관소 ‘온칼로(Onkalo)’. 이 곳은 핵폐기물로 가득 채워지면 영원히 닫힐 공간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후손들이 봉인된 핵폐기물을 발견하고 피라미드나 숨겨진 보물이라 생각한다면? 과연 대대손손 그들에게 위험경고를 전달할 수 있을까? 거대한 기계가 끊임 없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동안 지상의 전문가들은 방사성폐기물로부터 인류를 구할 희망을 찾고자 고군분투한다. (서울환경영화제 http://www.gffi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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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영화 <영원한 봉인(Into Eternity)> 웹사이트 http://www.intoeternitythemovie.com/

<폐기물 격리시설로의 우발적 침투의 방지 표지에 관한 전문가 평가> 보고서(1993년, 미국 에너지부) 원문(PDF)
http://www.wipp.energy.gov/PICsProg/Test1/SAND%2092-1382.pdf

[업데이트: 5월27일] 깊이 500m, 10만 년 숨겨야 할 금단의 지하(조홍섭 기자)
http://ecotopia.hani.co.kr/7178

[업데이트: 6월15일] 원자력 글짓기 대회의 기억(소설가 김지숙)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6101838295&code=9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