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즈미 다카시의 사진전 <핵 공포의 나날들>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시계탑의 멈춰진 바늘은 2시47분을 가리키고 있다. 3월 11일에 지진이 일어났던 시각.
이 사진을 보면서 묘하게도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의 멈춰진 괘종시계를 떠올렸다. 전시관 초입에 있다는 그 괘종시계는 11시2분을 가리킨 채 멈춰버렸다.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군의 핵폭탄이 폭발한 시각.
시계는 멈춰버렸지만,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고통이 고통인 것은 그것이 언제 끝날지조차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작 고통의 원인은 감춰지거나 망각된다.
모리즈미 다카시의 사진전 <핵 공포의 나날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도 그렇다. 핵 폭탄과 핵 에너지 그리고 그것의 부산물인 치명적인 방사능 오염은 어느 사진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생존자들에게 남겨진 고통의 흔적뿐.
퉁퉁 부은 듯 얼굴에 생긴 혹으로 두 눈이 덮인 한 소년이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베릿쿠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카자흐스탄 세미파라친스크의 즈나미엔카 마을에서 산다. 이 마을은 수많은 핵실험이 이루어진 실험장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베릿쿠의 부모님은 "버섯구름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구 소련은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초원에서 1949년부터 1989년까지 40년에 걸쳐 467회의 핵실험을 했다. 주변에 흩뿌려진 방사성물질은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5000배라고 한다. 이 핵실험은 일체 알려지지 않아 많은 주민이 피폭되어 암이나 백혈병 등으로 죽어갔다."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태어난 아이들도 선천성 장애와 병으로 계속 고통 당하고 있으며, 그 유전적 영향은 몇 세대에 걸쳐 계속되리라 한다."
한 아이가 활짝 웃고 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처음으로 미국과 영국이 사용한 방사성물질로 만들어진 열화 우라늄탄으로 이라크의 사막 지대가 오염되었다. 전쟁이 끝난 수년 후, 암이나 백혈병이 특히 어린이들에게 많이 발생했다."
역시 전혀 몰랐던 이야기다.
"열화우라늄탄은 그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이 개입한 전쟁에서 계속 사용되어, 2001년 이후의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도 다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 이라크에서는 심각한 피해가 커져가고 있다. 열화 우라늄탄의 성분인 우라늄238은 반감기가 45억년, 즉 지구의 탄생으로부터 현재까지의 시간만큼 흘러야 반으로 감소한다. 달리 말하면, 그 치명적 영향은 영구적인 것이다."
아이 사진 옆에는 사막에 떨어져 있는 열화 우라늄탄의 모습이 나란히 걸려있다.
그리고 현재 일본. 방사성물질 오염으로 출하가 금지돼 시들어 죽은 양배추, 강제 처분돼 소가 사라진 텅 빈 축사를 부여잡고 있는 한 농민의 뒷모습 그리고 핵발전소 운영사 앞에 운집한 농민들… 이렇게 좌절은 그리고 분노는 계속된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 모두 연속된 핵 재앙에도 불구하고 핵 에너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국가들이다. 오늘날 핵 산업계를 지탱해주는 이른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은 오히려 핵폭탄(핵실험)과 핵 에너지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이번 사진전의 초대글에서 문규현 신부(생명평화마중물 대표)는 "후쿠시마 원전 재앙은 지구의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고, 그 위기의 무게만큼이나 전 세계적인 자각과 양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언
사진전 정보 | 6월13일~15일. 서울 조계사 경내 갤러리 ‘나무’. 생명평화마중물, 생태지평연구소 등 주관.
2011년 3월 11일,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이로 인해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후쿠시마현 동쪽 절반을 심각한 방사능 오염지대로 만들었습니다. 육지뿐만 아니라 해양오염도 심각합니다.
링크
모리즈미 다카시 웹사이트 http://www.morizumi-p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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