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고층 열광

지난 20여년도 안 되는 사이에 우리나라 건축물의 높이는 2배 가까이 높아졌다.

국내 초고층화는 대개 재개발, 뉴타운, 신도시 건설 등에서 지어지는 주상복합아파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덕분에, 현재 우리나라는 40층 이상의 주거건축물 수에서 세계 4위이고, 세계 100대 주거용 건물 가운데 9동이 국내에 있다.

이는 세계 3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참고로 세계 주거용 건물 순위에서 서울 도곡동의 타워팰리스 G동(263.7m, 865ft)은 3위, 목동의 하이페론 A동(256m, 840ft)은 6위에 해당한다.[각주:1]

한국의 초고층화가 주거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독특한 부동산 시장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서는 도심의 업무용 초고층화가 주요 도시에서 경쟁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 전면적인 초고층화 시대를 맞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초고층화 레이스에서 선두 그룹으로 나설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 

2007년 5월 27일자 뉴욕 타임즈는 한국에서 일고 있는 초고층빌딩 건설 붐은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는 열망의 표현이라고 진단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추진되는 초고층화에 뒤지지 않으려는 ‘민족적 정서’가 한국 내 초고층 빌딩 건설 붐의 한 요인이라면서, 이는 미국에서 초고층 빌딩 건설 시 문제가 되는 ‘사회적 반대’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가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초고층화에 대한 ‘사회적 반대’가 적은 보다 근본적인 까닭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거용 건물(아파트)을 중심으로 하는 부동산 개발 붐에 대한 강한 ‘사회적 학습’ 때문이다. IMF위기 전후로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그리고 완화된 재개발․재건축 및 부동산 규제 등에 힘입어,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건설은 2000년대 상반부 부동산 가격 폭등과 맞물어 전국적인 붐을 이루었다.

청약과열, 당첨에 따른 막대한 시세차익, 평당 가격의 지속적 갱신, 상상을 초월하는 집값 폭등, 최고급․최첨단 주거시설로서의 인식, 부와 계층적 권력 표상으로서 이미지 등은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를 둘러싸고 사회적으로 학습된 ‘열광의 면면’이다.

열광(熱狂)의 우리말 뜻은 ‘미친 듯이 날뜀’이고 영어로는 ‘wild enthusiasm’로 표시된다.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 열광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초고층건물을 둘러싸고 미친 듯이 날뛰는 우리의 모습을 의미한다면, 그 모습의 이면엔 우리의 ‘천민적 물욕’, 그치 줄 모르는 ‘개발의 욕망’, 더욱 강렬해지는 ‘자본의 욕망’이 웅크리고 있다. 초고층주상복합건물이 초고층이란 건축물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욕망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건축적 기술합리성은 이러한 욕망을 촉진하고 표현해주며 또한 정당화시켜준다. 우리사회에 근자에 들어 널리 확산되는 ‘초고층 찬양론’은 건축을 통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기술유토피아’의 한 현상으로, 이는 초고층을 향한 우리의 욕망을 기술공학적으로 충족시켜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하늘을 찌르는 건물을 늘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가시화되어 왔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빌론 사람들은 그들의 명성을 세상에 떨치기 위해 거대한 도시와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세우고자 했다.[각주:2] 이는 근대에 와서도 반복되고 있다.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 남기기 위한 크라이슬러의 욕망을, 평양의 유경호텔은 사회주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김일성의 욕망을, 말레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타워는 이슬람국의 우월성을 선보이기 위한 마하티르 전 수상의 욕망을 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삼성그룹 총수는 서울 도곡동에 102층짜리 건물을 지어 삼성 그룹의 본거지로 삼고자 했고, 롯데그룹 총수 또한 서울 잠실에 한 때 200층에 이르는 조형적 마천루를 짓고자 백방으로 힘을 썼다. 서울, 부산, 인천 등지에서 추진되고 있는 100층 이상 초고층의 건축은 세계화 시대 해당 도시의 경쟁력을 선점하기 위한 강한 개발욕망을 담고 있다.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의 초고층화 붐이 주상복합아파트와 같은 주거용 건물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와 달리, 부동산 투기와 같은 물욕적 열망을 함축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점에서는 우리의 초고층화는 초고층건물이 갖고 있는 건축적, 기술적, 미학적, 환경적 순기능만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강한 부정적 그림자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서 이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극복 없이는, 한국에서 초고층화는 진정한 도시적, 건축적, 환경적 발전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말하자면 초고층에 관한 열광, 기술유토피아가 난무하게 되면, 초고층화는 결국 우리의 도시에 짙은 그림자만 드리우게 된다.

 

2. 초고층에 대한 열광의 뿌리
그렇다면,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로 대표되는 고층건물에 대한 우리사회의 열광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고, 이의 (사회학적)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 가능할까?

첫째, 돈이 된다는 투기적 인식이다. 2000년대 전국을 강타한 부동산 투기 붐의 중심에는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가 창출하는 막대한 개발이익이다. 주상복합아파트란 이유로, 일반아파트와 다른 자유로운 분양신청, 분양권전매와 그로 인한 막대한 시세차익, 천정부지로 치솟는 평당 가격 등의 건설/건축 조건은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을 황금의 알을 낳는 것으로 인식시켜 왔다.

둘째, 신상류층의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으로서 효과다. 타워팰리스로 대표되는 주상복합아파트는 고가로 인해 서민들에게 한마디로 그림의 떡인 반면, 2000년대 한국의 신흥 부(자)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각주:3] 이는 단순한 상징만 아니라, 신상류층을 위한 새로운 ‘부동산 부’의 기반이면서, 그들 간에 일상의 방식을 특권적으로 공유하는 폐쇄적인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다. 이렇듯 주상복합형 초고층이란 건축물의 형태는 신상류층의 물적,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확대시켜주는 상징자본으로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각주:4]

셋째, 고도화된 토지 및 주택개발 논리다. 공급측면에서 보면,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의 건립은 기존의 고밀도 아파트 단지 혹은 주거지역을 최대한 개발이익을 남기는 방식으로 재개발, 재건축, 신축하는 방식에 따른 것이다. 초고층 건물은 저층건물에 비해 건축비가 더 들지만, 보통의 아파트지역(주거지역)에선 찾아먹을 수 없는 높은 용적률, 분양가, 주택 분양수 등의 조건을 최대한 건축으로 구현한 것이 곧 주상복합아파트다.

넷째, 공급주의 도시계획 혹은 도시정책이다. 도시계획이나 정책 차원에서 볼 때,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는 도심으로 상주인구와 첨단산업을 끌어들이고, 부족한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하며, 낙후된 도시경관을 일신하기 위한 구실로 허용된다.

주상복합아파트가 건립되기 위해서는 주거지역이 준주거지역으로 업조닝(upzoning) 되어야 하고, 용적률이 높아져야 하며, 층수규제가 완화되어야 하고, 민자 유치가 손쉬워야 한다.

한마디로 세계화 시대 경쟁력 있는 도시로 도시의 공간구조를 재편하려는 신자유주의식 도시계획의 등장이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를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게 했다.

다섯째, 자본을 위한 건조 환경(built environment)의 창출이다. 건축물로서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의 부동산적 가치는 과거 아파트의 가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자본투자를 필요로 한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에 의하면, 자본순환과정(circulation of capital)에서 발생한 잉여자본이 자본가치의 하락(devalorization)을 막기 위해 부동산 자본의 형태로 전환되어 건조 환경을 생산하게 된다. 우리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는 데이비드 하비가 말하는 건조 환경으로 생산된 것이다.

자본순환론에 따르면, 자본은 스스로의 과잉화에 따른 가치하락의 위기를 막기 위해 자본의 축적활동을 중장기적으로 지원하는 고정자본(fixed capital) 형태로 전환되는 것의 결과로 도시의 화려한 건조 환경이 생겨난다. 2000년대 한국의 도시에 출현한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는 1998년 IMF위기 이후 경제회복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사회적 잉여란 물적 조건이 없었더라면 그 출현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도시공간을 통한 자본순환과정에서 건조 환경은 자본을 저장하면서 동시에 자본의 중장기적인 축적활동을 돕는 인프라로 기능하며, 또한 도시공간/도시경관을 상품화하여이를 통해 자본의 가치생산을 돕는 기능을 수행한다.

여섯째, 한국적 신개발주의(neo-developmentalism)다. 한국은 여전히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나라로서, 소득이 배증될 때마다 그에 따른 광범위한 국토환경(파괴적) 개발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개발주의는 한국의 변함없는 중요한 국가적 코드란 뜻이다. 그러나 2000년대의 개발은 소득 1만불 시대에 맞게끔, 환경, 문화, 최첨단기술, 계획, 민주적 합의 등의 요소와 절차를 갖추기 때문에, 60년대, 70년대의 국가주도의 개발주의와 구분되며, 이점에서 신개발주의라 불려진다. 청계천 복원과 그 주변에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건립은 이러한 신개발주의 방식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2000년대 우리의 도시풍경을 채우고 있는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는 우리의 그칠 줄 모르는 개발욕망, 그것도 환경, 문화, 계획 등으로 포장된 (신)개발주의로 가일층 강화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일곱째, 기술유토피아주의다.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는 토지의 집약적 이용, 이를 통한 도시환경의 개선,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방지, 최첨단 주거환경의 제공, 도심으로 인구와 활동 유인에 의한 도심 경쟁력의 회복, 랜드마크의 형성으로 도시경관의 개선 등을 가능케 하는 건축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우리의 도시가 현재 직면한 모든 문제를 초고층건물의 건립을 통해 일거해 해소하는 강한 건축담론이 있다. 건축이란 공학적 기술을 통해 도시적 유토피아의 건설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건축담론은 일종의 기술유토피아와 같은 것이다. 근자에 우리사회에서 유포되고 있는 초고층론은 기술유토피아를 넘어 초고층에 관한 일종의 종교적 믿음마저 표방하고 있다.

여덟째, 천민적 근대성의 발로다. 앞서 소개했던 뉴욕타임즈에 의하면, 최근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초고층화는 일종의 민족주의를 표방한다. 그간 미국을 포함한 서구선진국이 독점했던 초고층 건축이 근자에 동아시아국가로 넘어 오는 것은 이들 나라가 대개 신흥발전국가로서 경제발전을 통해 엄청난 국력을 비축했고, 이를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한 국가적 욕망을 경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다름없다.

초고층화를 통해 표방되는 민족주의는 이런 점에서 딱히 한국적 현상만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고층화의 추세가 한국의 도시에선 유독 더 두드러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아직 농익지 못한, 그래서 천민적인 근성을 안고 있는 우리의 근대성(modernity)을 반영하고 있다.

기존의 도시를 다듬고 지키고, 도시의 역사와 정체성을 복원하며, 도시문화를 주체적으로 일구어 가는 수단으로서 보다는 기존의 도시환경을 지우고 없애며 철저한 부동산과 돈의 논리, 그리고 이를 통해 축적된 부와 그 권력을 추구하는 자체로 초고층건물이 우리 도시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들쑥날쑥한 건물로 채워지는 도시의 살풍경은 우리의 천민적 근대성[각주:5]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3. 빛만 보는 초고층론의 경계
초고층론자들이 말하는 초고층건물은 우리의 도시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일거해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토지의 집약적 이용, 교통문제의 해결, 도시확산의 방지, 시설의 집약적 이용에 따른 에너지 절약, 최첨단 주거양식의 제공, 도시안전의 도모, 매력적인 도시경관의 창출, 경제적 부가가치의 생산(생산유발, 고용창출 등), 도시경쟁력의 강화, 건설기술의 선진화와 경쟁 산업화, 국가 인지도의 향상 등 초고층건물이 가지는 잠재적 미덕은 사실상 끝이 없다.

그러나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제대로 된 초고층 건물’이다. 그러나 이 ‘제대로’란 전제는 경제학에서 이론적 법칙을 설명할 때 설정하는 ‘이상적 상황조건’과 같은 것이어서 현실에서 성립될 수 없는 게 태반이다.

말하자면, 초고층론자들이 말하는 초고층의 장점과 미덕은 우리의 현실에서 대부분 검증받기 쉽지 않고, 또한 실현화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가령, 초고층건물이 토지의 집약적 이용을 통해 개방공간 혹은 녹지공간을 획기적으로 확보하여 도시환경을 쾌적하게 만들고 교통유발을 줄여 도심교통문제의 해소에 기여하며, 랜드마크 조성으로 도시/국가적 경쟁력을 향상시켜준다는 주장은 우리의 현실에선 쉽사리 검증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가령, 적은 건폐율로 개방공간이 늘었다 하더라도 그 공간은 대개 지하에 인공시설을 갖추고 있고, 또한 대중적 접근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으며, 더욱이 개발논리 혹은 부동산 논리에 따라 종래엔 돈이 되는 건축공간으로 전용되기 십상이다. 교통만 하더라도 초고층건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동일 건물 내에서 공동의 시설을 이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교통유발을 줄일 뿐이다. 전반적으로 본다면 고급 자동차를 소유하고 이동성향이 높은 고소득자들이 입주함으로써 초고층복합아파트는 저층건물이 있을 때 보다 단위면적당 유동인구를 더 많이 수용한다.

현실성의 문제를 떠나, 초고층론이 가지는 보다 심각한 문제는 건축물이란 물리적 시설의 설치로 도시경쟁력과 같은 도시의 사회경제적 변용을 가져온다는 이른바 ‘환경결정주의’적 인식론이다. 가령, 랜드마크가 강한 초고층건축물은 신산업을 끌어드리고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도시경쟁력을 향상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산업의 육성, 관광객의 유치, 도시경쟁력의 강화는 도시의 산업, 도시의 관광자원, 도시의 정치경제 전반의 향상과 같은 도시적 소프트웨어에 의한 것이다. 고층건축물은 이러한 도시적 질을 담보하는 여러 조건의 하나일 뿐이다.

 

거꾸로 말한다면 도시의 산업, 도시의 관광, 도시의 경쟁력은 초고층건축물이 아니고도 개선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초고층 건물로 인해 도시경쟁력이 강화된다는 것은 도시경쟁력의 조건을 이미 갖춘 상태에서 초고층 건물이 이를 촉진시켜 주는 서구선진국의 현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일 뿐 초고층 건축물이 왜, 어떻게, 도시경쟁력을 강화시켰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에 최근 풍미하고 있는 초고층론은 초고층의 빛만 일면적으로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초고층론은, 우리의 도시에서 초고층이 실제 어떠한 빛으로 비추어질지에 관한 고민을 생략한 채, 맹목적 기술유토피아를 보여주고 있다.

 

앞 절에서 논급했듯이, 우리의 도시에 우후죽순으로 출현하고 있고 또한 출현할 초고층 건물은 초고층화에 관한 탐욕스러운 물욕, 자본주의적 욕망, 천민적 공간문화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초고층론자들이 강조하는 초고층의 빛은 우리 도시에서 실제 짙은 그림자로 변형되어 나타날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

도시환경을 되살리고 도시공간을 공동체적 삶터로 활용하며, 도시의 역사적 정체성을 복원하고 도시의 문화적 품격을 드높이는 조건의 초고층 건축물을 생산하기에 우리의 공간문화, 부동산에 관한 의식, 도시계획, 건설산업구조, 건축기술과 관행, 지방행정 등은 이를 결코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

초고층의 그림자가 이렇게 뚜렷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고층화에 대한 열광으로 인해 가려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맹목적인 초고층 찬양론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4. 초고층을 넘어: 어떠한 도시에, 어떻게 살길 원하는가?
초고층이 우리의 도시에 어떠한 빛과 그림자를 드리울지는 초고층론자들이 말하는 ‘초고층 효과’를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논의하고 검토해야 알게 될 쟁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초고층의 빛과 그림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초고층을 넘어가야 한다. 초고층이란 건축물에 갇혀 우리는 도시의 환경, 문화, 경제, 경쟁력 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고 올곧게 해결할 수 없다. 이들을 제대로 읽고 해결하기 위해선 초고층을 넘어 환경, 문화, 경제, 경쟁력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초고층을 이야기하기 전에, 도시에서 어떠한 삶을 살기 원하는 지를 물어보고 그 답을 찾아 봐야 한다. 거칠고 힘든 근대화를 넘어, 이젠 탈근대화의 단계로 접어든 우리의 21세기 도시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고민을 우선하고 난 연후에 초고층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 반대가 되어선 안된다. 삶의 문제, 사람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 역사의 문제로 돌아와 도시를 생각하고 그것이 담길 건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초고층을 과감하게 버려야 할지 모른다. 우람한 초고층들이 밀식된 뉴욕 맨해튼에서 초인간적규모의 건축과 환경으로부터 소외되고 왜소해지며, 특히 미국의 우월한 자본주의 문화에 압도되기보다 어수선하고 우중충하지만 로마의 아기자기한 골목길에서, 일정한 건축물의 높이와 배열로 아름다운 뽐내는 파리 상쟈르제 거리의 카페에서 우리는 그 도시의 삶과 정체성에 빠져보는 것이 더 값진 도시적 삶일지도 모른다.

불안한 역사적 상황, 그칠 줄 모르는 개발주의 욕망, 반문화적 도시정책 등으로, 우리는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정체성을 끊임없이 지우는 건축과 건설을 계속해 왔다.

아름다운 초고층건물을 지어 이제 우리 도시의 품격을 되살리자는 초고층주의자들의 제안이 있지만, 사실 그 제안은 도시에 일구어야 할 공간문화, 삶의 공간적 기억, 정체성의 표식들을 다시 학살하고 지우는 ‘포장된 개발주의’의 하나일 수 있다. 서울이란 도시에는 경복궁이 있고, 한강이 있으며, 내사산으로 불리는 도심주변의 아름다운 산이 있다.

그리고 어수선하지만 오밀조밀 살아가는 달동네와 같은 삶터가 있고, 가난한 사람, 돈 있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청계천 주변의 큰 장터도 있다. 이러한 것을 공간문화적 자원으로 도시를 어떻게 엮을 것이고, 어떻게 거기에 삶을 담아낼 것인가의 고민은, 이를 말살하고 그 위에 근사한 멋쟁이 초고층 빌딩 짓고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경쟁력이란 허상을 추구하는 것 보다 더 값진 것이리라.

이 점에서 우리는 듀바이의 버즈두바이 초고층 건물에서 보다 파리의 아름다운 저층 건축물에서 더 많은 도시적 지혜를 배워왔으면 한다.


*이 글은 지난 8월25일 부산환경운동연합이 주최했던 '부산 연안의 매립과 sky line의 변화 무엇이 문제인가' 시민토론회에서 조명래 단국대 교수가 발표한 주제발제 자료입니다. (부산환경운동연합: 051-465-0221, pusan_sky@kfem.or.kr)

  1. 세계 1위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21st Century Tower (269m, 883ft)’, 2위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Triumph-Palace(264m, 866ft)’다. [본문으로]
  2. 하늘에서 이 공사를 지켜 본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 맹랑한 시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각각 다르게 하여 서로 간에 의사소통을 혼란시킴으로써 결국 공사를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다. [본문으로]
  3. 그래서 초고층주상복합아파트를 현대판 ‘성(castle)’으로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4. 이런 점에서 2000년대 주상복합아파트를 배경으로 하는 신중상류층은 70년대, 80년대 강남개발에 따라 등장했던 중산층이 한국사회 변화와 더불어 진화된 것이 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근대성(modernity)은 본래 남성성을 표방한다. 미국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마천루는 남근을 직접 표상함으로서 보다 철저한 남성우월주의의 근대성을 표방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WRITTEN BY
언늬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 활동가 블로그입니다 leeje@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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