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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비상/째깍째깍 기후위기

인권의 렌즈를 통해 본 기후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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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기후변화 문제는 이산화탄소 등의 온실가스 배출을 감소시켜나감으로써 기상이변, 해수면상승, 사막화 등 지구온난화의 피해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환경 또는 경제 정책의 맥락에서 주로 논의되어왔다. 유엔인권이사회가 2008년 3월 채택한 결의 7/23호는 이러한 기존의 기후변화 대처 노력에서 간과되어왔던 ‘인권’의 문제를 상기시키면서 기후변화와 기후변화 대응 정책이 인권에 미치는 영향과 국가의 관련 인권 의무를 제기하고 있다.

결의 7/23호에 의거해 유엔인권최고대표실(OHCHR・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은 지난 1년간 관련 사례들을 바탕으로 기후변화와 인권의 관계를 분석, 연구해왔고, 2008년 3월 제10차 유엔인권이사회 정기회기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인권의 여러 영역 중 특히 생명권, 적정한 식량에 대한 권리, 식수 및 위생에 대한 권리, 건강권, 적정한 주거에 대한 권리, 자결권 등이 기후변화와 기후변화 대응정책들로 인해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 감소의 일환으로 화석 연료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농업연료(agrofuels)가 오히려 산림훼손, 토양침식 등 기존의 환경을 파괴할뿐더러 식품의 가격을 상승시켜 빈곤계층의 식량권을 현저히 저해하고 있는 현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권리위원회(CESCR)가 지난해 세계식량위기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도 이미 지적된 바 있다. 한국계 기업들도 진출해 있는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 지역에서는 대규모 바이오연료(biofuels) 팜오일 플랜테이션이 확장・조성되면서 해당 지역의 원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토지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채 강제퇴거되거나 플랜테이션 기업들의 노예와 같은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때문에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2007년부터 긴급경고(Early Warning) 절차 등을 통해 인도네시아 정부에 해당 지역 원주민들의 권리를 즉각 구제할 것을 거듭 촉구해왔다.

유엔인권최고대표실의 보고서는 또한 빈곤, 젠더, 연령, 소수자 지위, 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과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이미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취약성(vulnerability)이 기후변화를 통해 더욱 악화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또한 각국이 거시적 차원의 기술투자, 친환경 또는 경제성장 중심의 정책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취약집단의 상황과 필요에 주목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즉, 인권적 차원의 취약성 평가를 통해 우선 취약집단을 파악하고, 취약집단의 정보접근성과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협의 및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토록 하는 것이 기후변화 대응정책 마련에 있어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오는 6월 15일 ‘기후변화와 인권’을 주제로 패널 토의를 개최하여 기후변화와 기후변화 대응정책들이 여성, 아동, 노인, 원주민 등 취약집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한편, 인권의 원칙과 국가의 인권보호 의무가 기후변화 대응정책을 강화, 보충하는 데 있어 구체적인 지침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토론할 예정이다. 패널 토의 결과는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제15차 당사국 총회에 제출된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도, 공동이행제도, 청정개발체제 등 교토의정서의 이행 기재들은 반드시 국가의 인권보호 의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합니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국가의 책임 문제가 좀 더 심도 있게 검토되어야 하며, 인권영향평가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익환경법 국제변호사 단체인 Earth Justice의 제네바 대표 이브 라도(Yves Lador) 씨의 말이다. 유엔기후변화협약과 국제인권규약 간의 조우를 통해 인간의 얼굴을 가진 기후변화 대응 정책이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김기연 님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포럼아시아 국제사무국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월간 인권 2009년 5/6월호에 실렸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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