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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비상/칼럼

식량주권? "우리 밥상을 되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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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은 60년 전 유엔 인권선언이 채택되면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왜 굶주리는 사람들은 늘어나는 것일까? 11월5일 환경센터에서 열린 ‘씨앗’ 강좌는 이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했다. 서울환경연합이 주최한 ‘씨앗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주제의 강좌에서 김은진 교수(원광대 법과대학)는 세계의 굶주림을 놓고 서로 다른 관점이 경합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11월5일 환경센터에서 김은진 교수의 '씨앗은 누구의 것인가' 강좌가 열렸다


압축적 성장의 한가운데에 있던 70년대 한국에게 굶주림은 식량의 증산으로 해결할 대상이었다. 이른바 ‘녹색혁명’에서의 녹색은 다름 아닌 식량을 생산하는 농작물로서의 의미로, 여기엔 인간이 먹는 농산물을 다른 생물과 공유하지 않겠다는 배타적 인식이 전제돼 있었다. 이에 따라 살충제와 제초제를 사용하는 농작법이 한국에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량 생산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방식이 기아를 극복하는 올바른 처방전일까? 원인이 다른 데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꼽는 세 가지 핵심은 이렇다. 

먼저 분배의 문제다. 세계의 일부는 굶주리지만 동시대의 부유한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음식쓰레기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패트스푸드 네이션’으로 알려진 미국 도시에서는 매일 멀쩡히 버려지는 음식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농사를 지을 땅이 사라지면서 농업에 가해지는 압력도 크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지방의 토지들이 공장 용지에 빠르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오히려 많은 지자체들은 발 벗고 기업유치를 주도하는 입장이다. 과도한 목축이나 산림벌채가 기후변화와 악순환되면서 사막화되는 추세는 지역의 빈곤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공동체의 안정적인 거주와 농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전쟁 역시 굶주림을 심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왜 지독한 가난을 상상하면 가장 먼저 아프리카를 떠올리게 될까? 아프리카 대륙만큼 생태적으로 풍부하면서 농업을 위한 최적의 기후조건을 가진 지역이 또 있는가? 주민들이 6개월을 못 버티고 이주할 수밖에 없게 강제하는 것, 바로 20세기 들어 끊임없이 발생한 전쟁을 빼놓는다면 이 모순을 설명할 길이 없다.

김은진 교수는 “미국이 식량원조를 하지 않고 무기원조를 중단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면 식량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며 농민운동은 평화, 환경, 기업, 공동체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2007년 2월에 열린 식량주권포럼에서 비아 캄페시나를 비롯한 사회운동세력은 말리의 한 여성농민을 기리며 이름을 붙인 ‘닐레니 선언(Nyeleni)’을 발표했다. 여기서 전쟁과 시장논리에 지배되어온 식량문제에 대항하기 위한 논리로서 식량주권이라는 개념이 분명하게 제시됐다. (아래 '닐레니 선언문' 참고)

씨앗은 식량주권의 중심에 놓여있다. 이른바 개량종자는 제초제와 함께 등장했다. 새롭게 도입된 제초제의 독성은 토종작물이 견디지 못할 만큼 강했던 것.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는 농업으로 전환되면서 독성을 견디는 개량종자 역시 토종종자를 대체하게 됐다. 농민은 굶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옛말이 허망해지는 과정이었다.

사진=지구의 벗


개량종자는 화학비료와 같이 잘 자라기 위한 인위적인 조건을 만들어줘야 하는 문제 말고도 치명적 맹점이 있다. 토종종자처럼 씨를 받아서 쓸 수 없는 것이다. 개량종자에 우성 유전형이 많을수록 다시 종자를 만들 때 쓸모없는 종자가 생산될 확률 역시 높아지게 된다. 이런 특성을 간파한 일부 농민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거꾸로 우성형질의 종자를 찾아내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종자를 둘러싼 기업의 시각은 농민들과 달랐다. 미국의 종자 산업을 주도하는 종자무역협회는 종자를 지배하고 상업화하는 기업의 논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종자가 최우선’이라는 종자무역협회의 슬로건은 종자의 상업적 이용을 통해 농업을 지배하겠다는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불임종자와 같이 재생산이 불가능한 종자를 판매하면서 동시에 지적재산권이라는 무기를 통해 개별 농가들이 기업의 종자에 의존하게끔 만들어왔다. 이에 대해 농부들은 기업의 지적재산권에 대항해 그들 사이에 얼마든지 종자를 나눠가질 수 있으며, 단지 상업적 이용만 제한하는 농부권을 제기하며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개량종자가 제초제의 등장과 함께 도입됐다면, 거꾸로 농약에서 탈피하는 방식이 해결책이 될까? 흔히 언급되는 유기농이 바로 그 대안인가?

김은진 교수는 ‘유기농’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대해 먼저 질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학비료 안 쓰는 농업이 곧 유기농인가요? 범주가 다릅니다. 거꾸로 유기농을 하다 보니까 농약이 필요 없어진 된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라며 유기농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꼬집었다.

김은진 교수. 사진=서울환경연합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유기농이란 무엇일까? 결론은 간단하다. 예전 농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먼저 토지를 경작해 작물을 길러내는 경종농업이다. 여기에서 가축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전통적으로 소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 담당해왔고, 돼지는 먹다남은 것을 처리해줬으며, 닭은 부족한 단백질 영양을 보충해주는 달걀을 생산해줬다. 가축의 똥은 다시 거름으로 사용돼 농업의 순환적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과 같이 가축이 대량 사육되며 단순히 고기제품으로 상품화되는 맥락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일 년에 한 번 경작이 가능한 벼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환금작물이었다. 하지만 논 이외에 짜투리 땅을 이용한 텃밭농사 역시 소중한 식량의 원천이었다. 김은진 교수는 “보통 영어의 ‘garden’을 ‘정원’이라고 번역하면서 꽃과 나무의 모습을 연상하는데 오히려 온갖 것을 키우는 ‘텃밭’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통농법엔 윤작(돌려짓기)이나 간작(사이짓기)과 같은 지혜들이 숨어있기도 하다. 이른바 다품종 소량생산하는 윤작을 통해 토양이 스스로 영양분을 자생시키는 시간을 주는 동시에 깨 옆에 수수를 심는 경우와 같이 천적을 이용한 생물학적 방제를 이미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철 보리나 밀 경작은 간작의 오래된 방식이었다.

사진=지구의 벗


하지만 유기농에 대한 이와 같은 풍부한 이해가 과연 우리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가? 정부는 유기농에 대해 생태학적 관계성이나 다양성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기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기질비료와 미생물제재로 압축된 기준설정은 ‘유기농은 농약 안 쓴 농작물’이란 도식화된 인식을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앞에서 열거한 비료들은 농가들이 현실적으로 부담하기 어려울뿐더러 따라서 단작의 확대를 통해 ‘규모의 경제’로 인한 이익을 추구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단작은 미생물의 자생조건을 방해해 다시 화학비료의 유혹으로 돌아서게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유기농은 비싸니 아무나 못 먹는다’는 공공연한 말을 곧이 곧 대로 인정해야할까?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지난 30년간 채소와 과수 생산량이 4배 늘었고 인구 증가는 1.7배에 그쳤지만 왜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오히려 낮아졌는가? 이미 ‘녹색혁명’에서 꿈꿨던 엄청난 식량 증산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 수입식품 ‘파동’을 겪으며 국민들의 불신이 높으면서도 수입농산물은 끊임없이 소비되고 있을까? 

수입식품을 언급할 때 쉽게 떠올리는 패스트푸드 이외에도 외식과 가공식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초기 농산물 수입이 부진한 상황을 이어가자 정부는 중소기업에만 허용했던 ‘농산물 가공’을 대기업에게까지 허용했다. 결국 대기업들이 냉동만두를 시작으로 온갖 냉동식품 산업에 뛰어들었고, 곧 고추장, 된장 시장을 장악한 이후 김치, 국, 찌개, 밥 등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밥상을 지배해오게 된 맥락이다. 다시 말해 식량수입은 대기업들이 이미 끈을 놓기 싫을 수 없는 튼튼한 돈줄로 자리잡은 셈이다.

국산농산물을 소비하면 능사일까?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자체가 이미 외국종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식량자급률이 갈수록 낮아지는 상황에서 초국적 종자 기업들이 어느 날부터 씨앗조차 팔지 않게 된다면, 또는 모두 유전자조작 종자만 팔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이들에게 패스트푸드가 아닌 우리 밥상을 되찾아 주는 것이 식량주권 운동이다. 사진=서울환경연합


결국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김은진 교수는 식용유를 예로 들었다. 냉동식품이 늘면서 그에 따라 식용유 사용도 늘게 됐다. 여기서 발생하는 폐식용유가 골칫거리로 여겨졌고, 비누로 재활용하는 방법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폐식용유를 줄이려면 비누로 다시 만드는 방식이 대안일까? 발등에 떨어진 불(비누)을 끄기에 급급한 대응이 아닌 보다 근본적 처방(식용유 줄이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택, 자동차, 의류로 이어지는 구매 우선순위에 밀린 먹을 것에 대한 우리 안의 지위를 거꾸로 뒤집어보자는 것이다.

김은진 교수는 식량주권의 목표를 짧게 요약했다. 우리 밥상을 되찾는 것. 그리고 식량주권 운동은 과정에 있다는 것 역시 말이다. ‘옛날 농법’에 필요한 토종 종자 역시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발견될 것이다. 

이지언 서울환경운동연합 활동가(leeje@kfem.or.kr)

[깊이 읽기] 닐레니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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