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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비상/칼럼

폭설 그리고 ‘자동차 없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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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은 무엇보다도 ‘교통혼잡’에 대한 압박을 의미했다. 도로에 두껍게 쌓이는 눈이 교통 당국자들을 다급하게 만든 것은 당연하다. 폭설이 내리자 곧 주요 도로에 제설을 위한 중장비가 동원되거나 유례없이 엄청난 양의 염화칼슘이 뿌려진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거리를 덮은 눈이 오로지 ‘제거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동네 도로엔 눈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도로가 넓진 않지만 인근에 주차장이 있어서 차량들이 꽤 지나다니는 구간이었다. 내리막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을 조심히 옮기는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평소 차가 지나던 내리막길은 임시 ‘눈 썰매장’으로 변해있었다. 어릴 적 겨울 뒷산에서 눈 썰매를 타던 기억이 났다.

눈 썰매장으로 변한 거리


이번 폭설이 불러온 가장 분명한 풍경은 ‘도로에서 사라진 자동차’였다. 도로에는 차량이 지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거북이 운행’을 하는 일부의 자동차를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보도와 뚜렷이 분간이 되지 않는 도로 한가운데로 걸어 다녔다. 모든 지붕과 자동차 위에 덮인 눈과 설산의 풍경은 마치 서울이 아닌 이국에 있는 느낌을 주었다. 

문득 최근 읽었던 ‘자동차 없는 마을’ 보봉(Vauban)에 관한 글이 떠올랐다. 2006년 대표적인 ‘환경도시’로서 한국에서도 유명한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보봉 마을을 다녀와서 남긴 ‘지속가능성으로 가는 길에서(On the road to sustainability)’라는 글로서, 저자 영국 웨스트 잉글랜드 대학의 스티브 멜리아 교수는 공무원들과 주민들을 인터뷰했다.

‘자동차 없는’ 마을의 기획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는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회는 38만평에 이르는 신규부지 개발계획의 자문을 ‘포럼 보봉’이라는 주민모임에 위임했다. 전반적으로 자동차 이용을 제한하는 이 기획에 대해 의회는 회의적이었는데, 주민들 모두 확신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자동차 없는 마을'의 상상


“주민들이 ‘자동차 없는’ 마을 계획을 열렬히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자동차 이용을 줄이고 사람들에게 자동차 없는 생활에 대해 선택권을 주려고 했다.” 포럼 보봉의 전 대표자였던 주민이 전한 당시의 분위기다. 그래서 개발계획에는 주차장에 대한 낮은 요구를 증명해야 했고 미래의 잠재적인 필요에 대비해 예비 부지를 확보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보봉 주민들은 매년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려야 한다. 

자동차를 소유한 주민들이 감당하는 부담은 만만치 않다. 이들은 마을 외곽에 있는 다층 주차장의 자리를 ‘구매’해야 한다. 이 주차장은 의회 소유의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데, 자리마다 1만7500유로(2천4백만원)의 비용에 매달 별도의 요금도 내야 한단다. 포럼 보봉 대표는 “자동차 소유자가 자신의 시설에 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면서도 “높은 가격에 놀랐다”고 말했다.

보봉 마을엔 자동차가 전혀 들어갈 수 없을까? 그렇진 않다. 보봉 마을을 관통하는 보봉알레(Vaubanallee) 도로에선 30km/h 속도의 주행이 허용된다. 자동차 제한 구역에도 차량 진입 자체를 막지는 않는다. 다만 누구를 태우거나 배달하는 차량에 한해 허용되며, 속도는 사람이 걷는 속도만큼 느리게 유지돼야 한다.

자동차가 걸어다니는 도로?


이렇게 일면 복잡해 보이는 규칙에서 보봉 주민들이 누리고자 하는 혜택은 무엇일까? 멜리아 교수는 방문 당시 목격한 주거지역의 풍경이 말 그대로 자동차로부터의 ‘자유’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마을의 거리는 놀거나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차지였다.

보봉의 주요 교통수단은 다름 아닌 자전거다. 주민 4분의 3 이상이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다. 2006년 트램 선로가 보봉까지 연장돼 더 자주 운행되기 시작했지만, 자전거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자동차 소유와 이용은 오히려 반감됐다. 보봉의 자동차 소유 가구는 2000년 54%에서 2007년 20%로 크게 줄었다. 자동차 이용률은 16% 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거리는 아이들의 놀이터

우리의 도로는, 지금까지 그랬듯, 차량들로 다시 붐빌 것이다. 보봉의 사례를 언급하면 ‘너무 이상적이다’라는 반론이 되돌아올 만큼, 우리 사회에서 자동차의 지위는 굳건해 보인다. ‘석유’ 자동차 대신 ‘전기’ 자동차로의 대체가 ‘친환경’으로 강조되지만, 자동차의 존재 자체는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상상을 넘어, ‘자동차 없는’ 마을이 우리 사회에서도 언젠가 가능할까? 이상기후나 유가 급등과 같은 외부적 영향은 변화를 위한 조건일 뿐이다. 유가가 크게 올랐던 2008년 여름 고유가 대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유가가 곧 하락세로 돌아서자 온갖 ‘대책’들은 다시 자취를 감추기에 바빴다.

조롱받는 위기

따라서 부족한 것은 대책이 아니다. 위기가 올 때까지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믿음이 ‘대책’을 꺼내들기를 주저하게 만들 뿐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폭설을 치우기에 급급한 모습은 예상하기 어려운 외부적 충격에 상시적인 불안을 안고사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기후변화가 불러올 위기는 25센티미터 폭설의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문제는 위기에 대한 ‘무감각’이다. 갈수록 파격적인 이미지로 채워지는 공상과학적 재앙 영화를 보는 것처럼, 어느새 우리는 온갖 위기들의 ‘목록’을 무심하게 열거하고 있는 것 같다. 북극은 눈물을 흘릴지 몰라도,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들은 결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보봉 주민들은 ‘충격요법’에 기대지 않았다. 영화가 아니라, 자신의 살을 꼬집어줄 이웃들과 대화를 나눴다. 어쩌면 변화, 그리고 차이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서울에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하지만, 눈은 곧 녹을 것이다. 눈이 사그라지기 전에, 조용해진 거리를 더 걷고 싶다.

이지언

도움 받은 글 | <On the road to sustainability:transport and carfree living in Freiburg>(Steve Melia, 2006)

[윗사진] 지난 3일 도로에 내린 폭설 ⓒflickr=dummycode

[아래사진] 보봉 마을의 '자동차 제한' 주거지역의 모습과 지도 ⓒSteve M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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