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후 비상/째깍째깍 기후위기

여성농민들 ‘오늘 우리가 토종씨앗을 나눠준 이유’

탁자 위에 수수, 벼, 면화, 옥수수 따위의 작물들이 속속 놓인다. 누군가 수세미를 들어 손바닥에 두드리자, 속이 빈 줄 알았던 그것에서 납작한 씨앗이 툭툭 떨어진다. 딱딱한 껍질에 굵은 수염이 돋은 씨도 손 위에 올려본다. ‘아주까리’로도 불리는 피마자다. “중이염에 좋아요. 기름을 솜에 발라 바르기도 했죠. 살균효과가 뛰어나요.” 옆에서 설명을 붙인다. 눈처럼 하얀 목화를 만지작거리자 안에 딱딱한 것이 느껴진다. 역시, 씨앗이다.

12월 14일에 열린 ‘토종씨앗 축제’에 모인 씨앗과 작물은 강원부터 제주까지 각지 농민들이 저마다 재배해 수확해온 것들이다. 그 옆에서 참가자들의 손이 토종씨앗을 유리병에 담느라 분주하다. 둥글둥글한 모양이 모두 어슷비슷 닮았는데 팥이나 콩 말고도 시금치 같은 나물류의 씨앗도 있다. 이 씨앗들은 ‘한 명의 여성농민이 한 개의 토종씨앗를 지키자’는 운동의 결과물이다. 토종씨앗을 수확하고 나면 확산하고 또 확산토종씨앗을 심고 가꾸는 여성농민들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토종씨앗지킴이증’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들이 벽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물론 웃는 표정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밭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여성농민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 “3월 늦서리부터, 잦은 비로 일조량 부족과 가을엔 이른 서리까지... 한 해 내내 이런 소식이 이어졌다.” 심문희 전국여성농민회 전 사무총장은 이상기후의 영향을 언급했다. “올해 농사를 지으면서 기후변화를 온몸으로 느꼈다.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에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느꼈던 한 해였다. 더불어, 농민들이 지구를 지키고 지구를 식히는 장본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경상남도 함안에서 토종씨앗으로 농사를 짓는 김미경 씨는 기후변화에 관한 고민을 말했다. “(올해) 굉장히 기후가 안 좋았다. 작년에 비해 수확이 많이 줄어들었다. 생산물을 많이 만들어 돈을 많이 벌겠다는 농사가 아니기 때문에 내년에 잘 될 거라고 기대한다. 돈을 벌고 기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농사를 하려면 (비닐)하우스 농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토종농사를 전통농법 대로 지어보지 않은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생산물에 상관없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에 (여성농민회) 회원들이 합의하고 있다.”

김은진 원광대 교수는 현재 기후변화와 농업에 관한 논의에서 씨앗이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점을 꼬집었다.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면서 땅이나 물을 비롯한 자연적 조건의 언급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산물을 만들어내는 근본인 씨앗에 대해선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씨앗은 어디선가 당연히 구해질 것으로 점차 생각되는 것일까. 공장에서 만들어내든 구입해오든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농법은 사라져갔다.”

이어서 김은진 교수는 “지금의 유기농은 ‘상품가치가 높은 것으로서의 유기농’에 방점이 찍힌다. 최종 결과물이 어떤 인증을 받았는지가 훨씬 중요해진 것이 현재의 유기농이다. 씨앗조차 유기농 인증을 받으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면서 씨앗조차 상품화하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씨앗이라는 것은 돈 주고 사고파는 것이 아니다’는 기본 원칙에 따라 이날 토종씨앗를 무상으로 나눠준 대목도 같은 맥락에 있다.

토종씨앗 축제에 모인 50여명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오랫동안 토종씨앗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서왔던 안완식 박사는 이 운동에서 경험적으로 여성농민의 역할이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종자하면 여성이다. 올해 320종의 토종종자를 찾아낸 괴산에서도 85% 이상은 여성농민이 종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였다. 전국의 여성농민들이 토종(종자) 지키기를 하면 이제 3-4년 이내에 굉장히 크게 발전할 것이다.”

동지를 일주일여 앞둔 이날 참가자들은 팥물로 서로 손을 씻겨주고 새알심을 빚으며 팥죽을 끓여 나눠먹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을 중심으로 서울환경운동연합, 여성민우회생협, 전국여성연대, 서울여성회 단체들이 연대한 토종씨앗 운동은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며 서로를 북돋아주었다.

글/사진=이지언

더 많은 사진 보기
http://www.flickr.com/photos/ecoseoul/sets/72157625609368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