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후 비상/책 리뷰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 재난이 만드는 고립과 연대의 10가지 변주

반응형

기후변화가 사랑에 미치는 영향을 상상하는 10편의 소설

김기창,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 민음사, 2021

기후위기가 눈 앞에 닥친 인류 생존의 문제라는 과학계의 오랜 외침에 정치권은 무관심했다. 정치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대개 기후 문제를 추상적으로 대할 뿐 나와 주변 사람들의 삶에 당장 영향을 주는 문제로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숫자나 과학적 용어 또는 정책 논의와 별개로 기후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하나의 서사로 상상해보도록 도와주는 역할이 늘 아쉬웠다. 기후 문제를 매우 재치있게 풍자한 넷플릭스 「돈 룩 업(Don't Look Up, 2021)」 같은 영화가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지만, 현재 우리가 닥친 위기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기후위기는 행성 충돌처럼 '한 방'에 끝나는 재앙과는 다른 차원일테니까).

문학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환경 위기를 주제로 마거릿 애트우트 등 10명의 작가들이 쓴 단편을 엮은 「곰과 함께」(민음사, 2017)[각주:1]와 같은 해외 작품을 생각하면, 국내에도 이런 문학 작품이 나오길 기대했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은 이런 기대를 만족시키는 소설이다.

10편의 단편소설 중 3편만 서로 배경과 이야기가 연결됐고, 나머지 7편은 각각 독립된 내용으로 구성됐다. 기후가 망가진, 현재 또는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 미래라는 설정은 대체로 공통적이다. 국제 사회가 파리협정을 통해 지구 온도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ºC 이내로 막자고 합의했지만, 현재 각국의 기후 대책을 실행한다면 기온이 3ºC 수준으로 오른다는 게 현재 과학적 예측이니, 사실 소설의 설정 자체가 허구라고 할 수도 없다(오히려 소설은 여러 대목에서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이야기 또는 각주를 통해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한다. 독자의 문학적 흥을 너무 깨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가열된 지구에서 산호초가 황폐화되고 바다에 어류가 감소하거나(「소년만 알고 있다」), 평균 기온 54도 체감 온도 73의 극한 환경 속에 결국 '돔 시티'라는 인공 도시 거주권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고(「하이 피버 프로젝트」 등), 북극 해빙이 녹아 사람과 동물도 공멸 위기에 처하는(「약속의 땅」) 상황이 그려진다.

정해진 노선을 이탈한 극한의 기후 조건 속에서 뭇 생명들은 자기 터전을 잃거나 붕괴된 공동체에서 떨어져 고립된다. '돔시티' 같은 소수의 기득권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에 남을 수 없다면 홀로 낙오되거나 생존 터전을 찾아 끝없이 헤매야 한다. 낮 시간의 살인적인 태양의 열파를 피해 굴을 파서 들어가 겨우 몸 하나를 뉘이거나 폭염을 견디기 불가능한 도시의 자취방에서 나홀로 투쟁을 벌인다. 또 굶어죽거나 익사할 두려움과 위험을 안은 채 매일 녹고 갈라지는 빙하를 건넌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상황에서 인물들의 행위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만 몰아넣지는 않는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면서도 삶의 의미를 묻기를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사랑'이란 주제로 이를 풀어내는데, 사람과 사람간의 애정과 우애, 연대 의식일 수도 있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공생(「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은 안타깝지만 해피엔딩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모든 것을 증발시킬 것만 같은 폭염 속에서 싹튼 연민과 사랑의 감정은 각박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억제를 강요 당하거나 자기 부정되기 일쑤다(「지구에 커튼을 쳐 줄게」). 신념을 위해 각자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서로 소외되는 이야기에서는 개인의 실존적 고민을 다룬다(「1순위의 세계」).

망가져가는 기후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분투기를 담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1순위의 세계」에서는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 전환을 꿈꾸는 이들의 에피소드를 다뤘다는 점도 관전 포인트다.

각각 단편으로 짜여진 이야기가 단막극처럼 하나씩 읽는 재미를 주는 한편 충분한 몰입을 선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기후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엮어 국내 작품에서 보기 힘든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고 읽을 가치가 있다.

이지언

이런 구절

"폭염주의보가 아니라 분노주의보가 내려져야 할 듯했다. 욕을 섞지 않고 말하는 민원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용희는 추운 나라의 공무원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고, 분노주의보가 내려진 곳에서 아스라이 멀어지고 싶었다. 용희의 이성은 재깍재깍 작동을 멈추어 갔다."  -- 「지구에 커튼을 쳐 줄게」
  1. 원제는 「I'm With the Bears: Short Stories from a Damaged Planet」로 2011년 발간됐다. [본문으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