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제철, 미국에 8조5천억 규모 전기로 투자 공식화. 국내 신규 투자 계획은 '미정'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물량 공세로 시름을 앓던 국내 철강 업계가 최근 미국의 관세 발효까지 덮치며 깊은 위기감에 휩싸였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모든 무역 상대국에서 수입되는 철강·알루미늄에 대해 지난달 12일부터 25% 관세를 부과했다. 과거 대미 철강 수출에 적용되던 ‘263만 톤 무관세’ 쿼터도 사라졌다.
정부는 미국발 관세 장벽이 현실화되자 대책 마련에 분주해졌다. 3일 미국의 한국에 대한 26% 상호관세가 발표되자 한국 정부는 “미 정부의 관세 부과로 영향을 받을 업종과 기업에 대한 긴급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2월, 산업부는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국내 유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중국산 후판에 최대 38%의 반덤핑 관세 부과 조치를 내리는 등 통상 대책에 역량을 쏟아왔다.
철강재뿐 아니라 이번 달 3일부터 자동차에 대한 미국의 25% 관세도 공식 발효됐다. 미국은 국내 자동차의 최대 수출 시장인 만큼 타격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해 현대차와 기아가 미국에 판매한 차량은 총 184만 대로, 역대 판매량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른바 ‘관세 전쟁’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지난달 25일 현대자동차그룹이 2028년까지 미국에 총 210억 달러(약 31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히며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현대제철은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총 58억 달러(약 8조5천억 원)를 투자해 자동차 강판에 특화된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포스코가 이 사업에 지분 투자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며 국내 양대 철강사가 미국 현지 투자를 통해 관세 장벽을 나란히 돌파하려는 흐름을 나타냈다.
국내 철강사의 미국 현지 투자 소식은 국내 제철소의 폐쇄 흐름과 극적인 대비를 나타냈다. 건설 경기 침체로 수요가 감소하고 중국산 저가재 수입 증가로 이중고에 빠진 국내 철강 산업은 제철소 설비 중단과 폐쇄에 직면했다. 지난해 7월 포항제철소 1제강공장 폐쇄에 이어, 45년 넘게 가동한 1선재공장이 11월 폐쇄됐다. 현대제철도 가동률이 떨어진 포항2공장을 지난해 말 축소 가동하기로 했고, 올해 미국 투자 발표 직후인 4월 한 달간 인천공장의 철근 제품 생산라인을 운영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 세계 6위의 철강 생산국이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설비 대부분은 국내에 집중되어 있다. 다만 해외 투자와 설비 이전이 확대된다면 국내 철강 산업이 공동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국가 기간 산업인 철강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체질 개선은 불가피하다. 방향은 명확하다. 친환경 고부가가치 철강 생산으로의 전환이다. 산업부 역시 “국가 기간 산업인 철강의 지속가능한 성장 방안을 확보할 것”이라며 “글로벌 공급 과잉, 보호무역주의를 극복하고 고부가·저탄소 산업으로 도약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국내 철강의 전통적인 산업 경쟁력은 양호한 수준으로 평가됐다. 지난해 산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 철강 산업의 경쟁력은 세계 4위로 평가됐다. 일본, 미국, 독일 대비 경쟁력 격차가 존재하는 한편 중국에 비해 근소한 우위를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고로 관련 공정과 제품 개발 기술 역량이 높고 인적자본이 우수하다는 것이다.
반면, 친환경 기술 수준과 친환경 전환 인프라 측면에서 열위인 것으로 평가됐다. 다시 말해, 국내 철강 산업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확보하려면, 저탄소 철강 생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린 철강(green steel)’이 세계 철강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빠르게 높아질 전망이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 분석에 따르면, 2021년 약 1천5백만 톤이었던 그린 철강 수요는 2030년 2억 톤으로 10배 가량 늘어날 전망이다. 이는 2030년 세계 철강 전체 소비량의 10%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그린 철강이란 석탄이나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청정 전력이나 수소로 만드는 철강을 의미한다.
철강 생산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7~9%를 배출하는 대표적인 탄소집약 산업이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조강 1톤을 생산할 때 이산화탄소 1.9톤이 배출된다. 이는 쇳물을 만드는 고로 공정에서 석탄을 환원제와 에너지원으로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현재 철강 생산량의 70%는 고로 공정을 거쳐 생산된다.
전기로는 고철이나 직접환원철 같은 원료를 전기로 용융해 조강을 생산하기 때문에 석탄을 투입하는 고로에 비해 온실가스를 75% 적게 배출한다. 천연가스 대신 ‘그린 수소(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수소)’로 생산된 직접환원철을 활용한 경우 온실가스 배출량을 95% 가량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친환경 철강 설비 투자가 미국에서 과감하게 추진되는 반면 국내에서는 잰걸음을 나타내는 양상이다. 이번에 현대제철이 2029년까지 미국에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설비는 270만톤 규모의 직접환원철 원료생산 설비와 전기로다. 이는 현대제철의 국내 생산 설비의 11%에 해당하는 규모다.
국내 신규 전기로 투자는 포스코의 광양제철 전기로 건설이 대표적이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에 들어설 250만톤 규모의 전기로 공장을 지난해 착공했고, 2026년부터 가동할 예정이다. 고로 중심의 철강 생산 체계를 고수해왔던 포스코로서 친환경 철강 생산 기반을 다지기 위한 중요한 행보다.
다만 포스코의 국내 전기로 투자 발표는 단 1기에 그치고 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뿐 아니라 포항제철에도 2027년까지 전기로 1기의 신규 건설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투자 계획은 불투명한 상태다. 지난해 포항제철에 전기용융로를 도입했지만, 이는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을 위한 소규모 시험 설비다. 광양에 1기의 전기로가 가동하더라도 이는 포스코 전체 고로 설비 규모의 5% 수준에 그친다.
현대제철은 탄소중립의 일환으로 2030년까지 국내에서 전기로를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신규 설비 도입 일정은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올해 상반기 내 당진제철에 있는 전기로 박판공장이 재가동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2020년 6월 가동 중단됐던 설비로, 전기로와 고로에서 각각 생산된 용강과 용선을 ‘합탕’해 탄소 배출량을 기존 대비 20% 줄인 철강재를 생산하는 과도기적 목적이다.
더 나아가 현대제철은 탄소 배출량을 40% 수준으로 저감할 수 있는 ‘신 전기로’를 2030년 전에 신규 도입할 계획을 밝혀왔다. 다만, 도입 시기를 당초 2029년으로 제시했다가 최근 이마저도 ‘검토 중’이라며 도입 시기가 불투명하다.
국내 철강 산업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국내 설비의 저탄소 전환을 위한 과감한 투자는 필수다. 탄소 무역 장벽은 일반 관세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유럽연합은 2026년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본격적으로 시행한다. 올해 말까지는 철강을 포함한 6개 품목의 탄소배출량 보고 의무만 부여되지만, 내년부터는 초과 배출량에 상응하는 인증서를 구매해 제출해야 한다. 아울러 유럽연합 집행위는 올해 4분기에 탄소국경조정제도 적용 범위를 철강, 알루미늄 집약적 다운스트림 제품(완성제품)으로 확대하는 입법안을 제안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번 달 미국에서도 미국산 제품대비 탄소배출량이 높은 수입품에 최대 200%까지 수수료를 부과하는 ‘외국 오염물질 부담금법’ 법안이 공화당 주도로 재발의됐다. 미국은 철강 생산에서 전기로 비중이 70%를 차지해 주요 철강 생산국 중 가장 낮은 탄소집약도를 나타내고 있다. 한국은 국내서 생산한 철강의 40%를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해외로 수출한다. 글로벌 탄소 관세 장벽의 확장은 수출 의존적인 국내 철강 산업계에게 눈 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전기로 확대와 함께 친환경 전력 조달을 위한 투자도 병행될 필요가 있다. 재생에너지 전력은 그린 철강의 필수 요소다. 최근 해외 주요 철강사들은 그린 철강 생산을 위해 재생에너지 전력을 조달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스웨덴 철강 기업인 SSAB는 2022년 기준 전체 전력소비량의 32%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했다. SSAB는 내년부터 저탄소 철강을 양산할 계획이다. 미국 철강사 US스틸의 경우 2022년 총 전력소비량 중 17%를 재생에너지로 조달했다. 반면, 포스코와 현대제철을 비롯한 국내 주요 철강사의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은 1% 수준에 불과하다.
산업계는 경기 악화 상황에서 전기요금 완화를 정부에 호소하고 있다. 산업용 전기요금을 인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부 설명에 따르면, 산업용 전기요금이 몇차례 인상됐지만 여전히 원가 이하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대비 낮은 수준에 해당한다.
철강사들은 비싼 전기요금을 근거로 제철소에 자체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면서 탄소중립 선언이 퇴색되고 있다. 현대제철과 포스코는 각각 8000억 원을 투자해 당진제철과 포항제철에 499MW와 600MW 규모의 신규 LNG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허가를 진행 중이다. 저탄소 철강 생산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전력 공급에서 화석연료 대신 재생에너지 투자가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의 친환경 투자와 함께 정부 지원도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산업부는 30만톤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연구개발(R&D) 프로젝트에 2030년까지 약 8800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환경부도 기업의 저탄소 혁신기술 도입을 지원하는 탄소차액계약제도(CCfD) 시범사업에 올해 100억 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산업의 탄소중립 이행과 경쟁력 확보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 대비 재정 지원 규모가 낮다. 정부가 연구개발 지원을 넘어서 그린철강 상용 설비 도입으로 지원 범위와 규모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올해 출범할 새정부가 놓쳐선 안 될 중요한 과제다.
이지언 기후넥서스 활동가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